메가미도 할로윈
메가미도 할로윈 (시드님 리퀘스트)
시월의 마지막 날, 가을이 한창인 계절에 미도는 사무실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해는 날이 갈수록 저무는 시간을 빨리해, 미도가 나왔을 때에는 이미 서쪽 하늘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새로 설립한 회사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조롭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쟁취한다, 라는 이름 그대로 주위의 모두가 놀랄 만한 성과를 하루하루, 차례차례 일궈나가고 있는 AA사였지만, 신생 회사인데다 사원수도 적은 만큼 그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사원들의 노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하직원들에게 그런 가혹한 노동량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자연히 사에키와 미도, 회사의 두 기둥이자 공동 창립자인 그들이 일상을 갈아 넣다시피 하며 일에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두 사람 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워커홀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겨울에 재회해 한두 달 후에 회사를 설립, 계절은 봄과 여름을 넘어 가을에 이르렀다. 회사는 점차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일은 여전히 바빴지만 가끔 이렇게 숨 돌릴 여유 정도는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 오기까지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생각하면 한숨과 함께 자연히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고생은 그야 MGN에 있을 적보다도 훨씬 고생이었지만, 과연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제 손으로 설립한 회사를 제 힘으로 키워간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 넘치는 일인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은 또 어떻고. 미도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그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남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생각보다도 재미있어서…….
생각하다 미도가 미소를 지었다. 제 차를 주차해놓은 곳으로 향하면서 미도는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사에키에 대해 생각했다. 일곱 살이나 어린 연하의 남자, 만남의 형태는 그야말로 최악 중에서도 최악, 지금에 와서도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투성이였지만……직장 동료로서의 사에키는 제 생각보다도 훨씬 괜찮은 파트너였다. 그의 유능함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한 회사의 사장과 부사장 자리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니 과연 그가 해온 일들을 서류상으로만 보고받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에 더해, 이제는 전과 달리 그가 적극적으로 전두지휘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그의 능력들이 더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미도는 왜 그가 새 회사를 세우겠다 마음먹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에키 카츠야는 천성이 남의 아래에 있을 남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집단의 머리가 되어서 전체를 이끄는 것으로 더 빛나는 사람이라니. 미도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야, 연인적인 면을 제쳐두고서라도, 제가 매료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미도는 연인으로서의 사에키를 제쳐둘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한 프로젝트가 일단락되고 본격적으로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인 그 사이, 모처럼만의 한가한 일자를 잡아 일찍 퇴근한 것이 아닌가.
여섯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해는 벌써 저물기 시작해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원들에게는 잔업이나 야근을 권하지는 않고 퇴근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퇴근하도록 지시해 두었지만, 정작 미도나 사에키가 여섯시를 맞추어 퇴근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미도는 모처럼 일찍 퇴근하고 있건만 저무는 날을 보며 시간이 퍽 늦은 것처럼 느껴져 씁쓸하게 웃었다. 미도는 얼른 집으로 향해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요기를 한 다음, 다시 이 오피스 빌딩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야 물론, 다시 올 때는 회사가 아니라 사에키의 집에 방문하기 위함이었지만.
전자식 키의 버튼을 누르자 삑삑, 하는 소리를 내며 자가용의 잠금이 풀렸다. 푹신한 가죽 시트의 승차감 좋은 차에 몸을 실은 미도가 팔다리를 쭉 뻗어 한 번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이완시켰다가 가볍게 핸들을 쥐었다. 아무리 바쁜 그들이라도 주말 정도는 쉬었고 가끔 데이트도 즐겼지만, 그래도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은 즐거운 법이었다. 직장에서야 매일 얼굴을 맞대고 몇 시간이고 회의를 하기도 했지만, 직장과 오프에서의 시간은 태도도 마음가짐도 완전히 별개였다. 만나러 가는 느낌이 완전히 다른 게 당연했다. 그야, 출근할 때마다 첫사랑에 빠진 여고생처럼 설레서야 도저히 일을 못할 것이기도 했고.―그러기에는 미도는 너무 프로페셔널했다― 오늘 미도는 사에키에게 찾아가겠다는 말을 일부러 전하지 않았다. 사에키는 미도보다 조금 전에 퇴근했으니 무언가 다른 볼일이 있었다고 해도 저녁때에는 집에 있을 터. 갑작스럽게 찾아가면 사에키는 놀랄까,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며 여유롭게 웃을까. 미도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차체를 울리는 시동음이 경쾌했다. 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향했다.
사에키가 놀랄 것을 기대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사에키가 놀라지 않을 것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미도는 결코 이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고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웃으며 사에키에게 인사할 준비를 하던 미도를 맞이한 것은,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튀어나온 호박이었다. 그것도 세모꼴로 눈구멍에 코에 비죽하게 입까지 뚫린.
“Trick or treat.”
호박이 말했다.
“……뭐?”
“Trick or treat입니다. 미도 씨.”
사에키의 목소리를 한 호박이 말했다. 두껍게 파인 호박의 세모꼴 눈 속에서 사에키와 눈이 마주친 미도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Trick or treat.”
“대체 무슨……. 아. 그렇지. 오늘이 할로윈인가.”
“그렇습니다. Trick or treat.”
“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걸. 오늘이 시월 말일인 건 알았지만……. 어쩐지 거리가 소란스럽더라니.”
“Trick or treat이라니까요.”
호박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미도는 당황함을 미처 숨길 정신도 없이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 정성스레 준비한 데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이 할로윈이란 걸 지금 알았어.”
“그럼 장난을 당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호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한 것이, 어째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미도는 목덜미에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끼며―사에키의 장난이 무엇일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그래. 와인이라면 가지고 있다. 맛이 깊으면서 적당히 달아서 서늘한 밤에 마시기 좋은 것으로 특별히 신경 써서 골라왔는데…….”
“당신은 어린이에게 뭘 선물할 셈입니까?”
“자네는 어린이가 아니잖아.”
내 애인이 어린애면 곤란해. 미도가 조금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말에 호박이 작게 실소하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섰다.
“미도 씨는 제 동심을 너무 몰라주는군요. 일단 들어오십시오. 계속 현관에 서 있을 수도 없으니.”
“동심 같은 소리…….”
정욕을 잘못 말한 거겠지. 미도가 입 밖으로는 내지 않은 채 속으로만 생각했다.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실내로 들어서자 익숙한 형태의 넓은 거실이 보였다. 과연 사에키가 이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인 듯, 평소 밝게 켜두던 거실 조명은 내려져 있고 대신 은은한 빛의 할로겐 등과 부드러운 색의 스탠드와 테이블 위의 촛불이 광원을 대신하고 있었다. 썩 분위기를 낸 모습을 보며 미도가 부드럽게 웃었다. 거실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평소처럼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가볍게 걸쳐두고 소파에 앉으려던 미도는 그 자리를 미리 차지하고 있던 선객을 보며 움찔 몸을 굳혔다.
“……이게……이건 또 무슨.”
“생각보다 안 놀라시네요.”
“충분히 놀라고 있어!”
새카만 거미, 커다란, 그러니까 제 얼굴보다도 커다란, 털이 부숭부숭 돋은 시커먼 거미를 보며 뻣뻣하게 굳은 미도가 왈칵 외쳤다.
“어린애인가, 자네는!”
“방금 전엔 어린애이면 곤란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대체…….”
“아, 그냥 인형입니다. 혹시 거미는 무서우십니까?”
“……딱히, 무서운 건 아냐.”
반응이 말과는 영 딴판인데요, 놀리듯 내뱉어진 사에키의 말에 미도가 그를 홱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호박을 뒤집어쓴 채여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명백하게 미도를 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미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에키를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서워하는 건 아냐, 징그러운 건 다른 얘기지. 대체, 열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게 다 뭔가.”
“그냥 사소한 장난입니다. 그거, 그래 봬도 가까이서 보면 얼굴은 꽤 귀엽게 생겼다고요.”
“알고 싶지 않아.”
미도의 말에 사에키가 하하 웃으며 그제야 호박 탈을 벗었다. 탈이 퍽 갑갑했던 듯 흘러내린 앞머리가 약간 땀에 젖어 이마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탈을 공중에 가볍게 던졌다 받는 손길에 안에서 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장난은 그게 마지막이니까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거 잘됐군. 모쪼록 그러길 바라.”
“정말입니다. 저도 바빠서, 더 준비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시간이 없어서 다행이군. 이런 장난질이 앞으로도 많다면 돌아가고 싶었을 참이야.”
“그건 제가 곤란합니다. 이렇게 정성들여 준비했는데.”
사에키가 웃으며 손을 젓고 미도는 거실에서 기다리도록 한 다음 부엌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었단 건 정말입니다. 이 탈만 해도, 준비하는 데 고생이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안주는 호박 스프입니다. 괜찮으시죠?”
“……그거, 진짜 호박이었나?”
“진짜 호박입니다. 안심하세요, 안쪽은 몽땅 긁어내고 몇 번이고 깨끗하게 씻어 잘 말렸으니. 그래도 호박 냄새는 좀 나지만.”
“자네는 정말…….”
어째서 그렇게까지. 미도가 조금 기가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이 남자가 뭐든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대체 할로윈 장난질을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일 건 또 무어란 말인가. 미도는 사에키가 평소에 얼마나 회사일로 바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잘도 저런 꿍꿍이를 꾸밀 생각이 들었구나 싶었다.
“그냥, 간만에 시간이 빌 것 같았지 않습니까. 또 간만의 이벤트기도 하고. 이런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준비해봤을 뿐입니다.”
“……두 번은 싫어.”
그 말에 사에키가 하하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쟁반에 담아 내오는 스프에서는 썩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미도는 그쯤에서 불평은 그만두기로 했다. 오프너로 익숙하게 와인을 열자 퐁, 하며 코르크 빠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투명한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가볍게 맞부딪히자 안에서 붉은 빛 와인이 찰랑였다. 호박 스프와 함께 내온 간단한 안주거리를 곁들이며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점차 서늘해지기 시작한 날씨와 맞물려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났다. 달달한 와인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것이 만족스러워 미도가 살짝 웃었다.
“미도.”
부르는 목소리에 미도가 고개를 돌리자, 뻗어 나온 손가락이 뺨을 쓸고 귀를 스쳐 뒷머리를 휘감아 미도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가볍게 맞부딪히는 따뜻한 감촉에 미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즐겁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늘게 접히며 웃음 짓는 눈을 바라보며 따라서 가볍게 웃은 미도의 눈이 이내 살짝 내려감겼다. 하, 가볍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하고 매끄러운 혀가 깊이 파고들었다. 혀끝에 와인향이 감돌았다. 달콤하게 퍼져나간 향은 혀를 부드럽게 적시고 입 안을 휘젓다가, 이내 쌉싸래하고 어른스러운 알콜의 맛으로 탈바꿈하고 목 뒤로 넘어갔다. 사에키가 목을 울려 웃는 것이 입술 너머로 느껴졌다.
“……하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었다. 어느 새 사에키의 어깨에 짚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떨어지며 미도는 제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것을 느꼈다. 조명이 어두워 사에키에게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니, 평소에 실컷 보이고 있으니 소용없나. 미도가 생각했다.
“날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냥, 네 생각을 조금.”
“……이건 도발인가?”
“…….”
미도가 사에키를 보자, 과연 도발당한 듯 미간을 슬쩍 좁히며 웃고 있는 사에키의 얼굴이 보였다. 미도는 그 얼굴을 보고, 도발당해 초조해하는 사에키가 조금 어린애같이 귀엽다고 생각을 하고, 입술을 끌어올려 웃으며 말했다.
“Trick or treat, 아니었던가? 과자가 없었으니 장난을 칠 차례겠지?”
“아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사에키가 손을 들어 목의 셔츠 단추 하나를 풀었다.
“날 이렇게 도발한 이상, 각오는 되어 있는 거겠죠? 미도 씨?”
“그야 물론.”
어린애에게는 사탕을 줘야지. 저를 끌어안아 덮쳐 눌러오는 사에키의 귓가에 미도가 속삭였다. 큭큭 웃는 소리와 함께 상의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에키의 손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미도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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