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궁 리퀘 엠프렉
애리얼님 리퀘스트
아직 배도 안 나온 아처 아랫배에 손 가져다대려다가 귀 갖다대보는 왕님 보고싶어여 아처가 아직 태동 느껴지려면 멀었다고 타박해도 길가메쉬는 흔한 일이지만 수태란 참 신기한 일이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든가 그래서 아처가 힘빠지는 그런게 보고싶습니다..ㅜ0ㅜ 자포자기하고 아처가 책이나 읽어달라고 한다든가 그런...! 대책없는데 나름 평범한 뭔가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둘이 보고싶어여...ㅜ0ㅜ
*남성임신 소재 주의
금궁 엠프렉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아처가 길가메시의 페이스대로 휘둘리는 일쯤이야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만만찮은 성격이라는 평가를 듣고는 했던 아처로서도 역시 길가메시는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이었다. 아처는 그리 드물지 않게 길가메시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처도 제 의지로 그와 어울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처 역시 길가메시의 성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를 자진해서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자신을 쥐고 흔드는 것을 어느 정도는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각오를 했다고 한들, 용인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길가메시는 본디 아처가 얌전히만 나온다면 그를 크게 괴롭히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본성부터가 지배하는 왕이어서, 거스르는 자에게는 가차 없을지라도 순순히 따르는 자에게는 못되게 굴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처도 그와 함께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화시대의 스케일이라는 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전부터 영웅들과 조우하고 사후 스스로가 영령이 되어 신비라는 것에도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인류 최고의 영웅왕이라는 자는 현대의 영령인 아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켜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평소처럼 몸을 섞고 한 침대에서 잠이 들어 평소처럼 아침 일찍 눈을 뜬 아처에게 묘하게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로 길가메시가 이렇게 고해 왔던 것이었다.
“회임하였구나. 아처.”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뒤집어쓰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아처는 자신이 잠이 덜 깨었는지, 혹여 아직 꿈을 꾸고 있는지 고민했다. 아니라면 무언가 말을 잘못 들었는지도. 그러나 영령의 청력이라는 것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아처는 왜 자기가 아침부터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스러워졌다.
“……뭐?”
“회임했다고 했다.”
“회임?”
“네 복중에 태아를 임신하였다고. 알아듣기 어려우냐?”
“…….”
할 말이 많고 생각이 꼬이니 말이 오히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아처가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말을 똑바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뜬금없이 임신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아니, 그 전에 이 자는 성별이라는 것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남성이다.”
“모를 리 있겠느냐.”
“아는지 모르겠다만, 남자는 임신을 못 해.”
“보통은 그러하지.”
“……보통은?”
“그러니 짐이 이때껏 공을 들인 것이 아니겠느냐. 정말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어 어렵겠느냐.”
길가메시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아처에게 제 아이를 품게 만들고 싶었고, 공교롭게도 아처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임신할 수 있도록 수단방법을 동원해 결국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은 몽땅 빠져있었지만 아처는 물어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제 이해가 따라잡지 못할 영역일 것이었다. 마치 현재 상황이 그렇듯이.
“그러니까, 지금 네가, 임신을 시켰다고……나를.”
“그러하다.”
공황상태가 된 아처의 머릿속과는 대조적으로, 상쾌하게 대답한 길가메시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내 의사는.”
“왕의 아이를 품는 영광을 마다하는 불경을 저지를 것이 훤하여 구태여 묻지 않았다.”
“허.”
“그래서, 화가 나느냐?”
“그걸 말이라고!”
“허면 어찌할 테냐? 이미 깃들어버린 생명인 것을.”
그렇게 말하며 길가메시가 손을 뻗어 아처의 명치께를 짚었다. 어두운 색 피부 위에 가볍게 얹힌 흰 손가락이 아처의 복근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 아랫배 근처에서 멈추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그에 길가메시에게 무어라 소리치려던 아처가 움찔 행동을 멈추었다. 배 위에 머문 손이 여기에 한 생명이 있다 말하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어제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자신의 몸이었다. 아처는 무심코 자신의 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인가? 임신이라는 게.”
“그런 일로 거짓을 말할까.”
“어떻게 확신하지?”
“그 정도야 보면 느낄 수 있다.”
배 위를 머물던 하얀 손이 거두어졌다. 아처가 고개를 들자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 눈앞에 있는 이 몸은 절반 이상이 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아이다. 모를 리가 있겠느냐.”
‘나의 아이’, 하고 약간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아처의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그 목소리에 기묘한 힘이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말없이 길가메시와 시선을 섞고 있던 아처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몸을 일으켰다. 길가메시를 등진 채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헌데 생각보다 반응이 없구나. 한참을 성을 내는 것도 자비로이 들어줄 요량이었건만.”
“뭐, 그래. 얼굴도 보기 싫군.”
아처가 헛웃음을 내뱉듯 말했다. 방을 가로질러 걸어 문고리를 쥐는 등에 길가메시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아무리 네놈 심사가 뒤틀렸다 한들 네 지아비인 것을.”
“누가 내,”
지아비라는 거냐.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돌려세워진 아처는 맞닿아오는 입술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반박의 말을 집어삼키고 얽어오는 혀와 함께 길가메시의 팔이 아처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끌어당겼다. 뒤통수를 가볍게 쓰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끼며 아처가 살짝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명백하게 웃는 기색을 담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떨어져나간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쓴 아처는 길가메시가 허리를 놓아주었음에도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가만히 서 있었다.
“…….”
잠시 눈을 내리뜨고 있던 아처는 이내 말없이 단호하게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내내 그의 등에 달라붙은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뒤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것도. 아처는 인상을 쓰고 가볍게 혀를 찼다. 스스로 배 위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아처에게 있어서 길가메시의 만행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집에 반려 동물 하나를 들여놓는 데에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들 말하건만 느닷없이 임신이라니,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것은 기쁘고 축복할 일이어야 마땅했지만, 아이를 낳아 키울 여건은커녕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임신 소식을 들어 봐야 태평하게 기뻐하기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처는 이때껏 스스로 임신할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 원흉인 길가메시를 얼마나 원망하든 저주하든 간에 아처는 본래부터 죄 없는 아이를 미워할 성미는 되지 못했다. 길가메시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화내듯 도망쳐 나와 그를 피한 지 며칠째. 여전히 그의 몸은 그가 알던 그대로였고 진짜 임신한 것이 맞기는 한 건지 믿기지 않기는 하면서도, 아처는 일단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신토의 대형 서점에서 육아 관련 코너를 기웃거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아처가 생전부터 또래의 다른 남자들보다는 가정적인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육아에 관해 정확하고 자세한 지식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결혼은커녕 평생 홀몸으로 전장을 떠돈 자였다. 스치듯 만난 여자의 수가 어떻다고 한들 육아 경험이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아처는 책을 고르면서도 대체 본인이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임신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과연 이런 일반적인 여성용 지식들이 도움이 되기는 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책 몇 권을 골랐다. 그 옆에서 요리책 코너를 실컷 구경한 것은 덤이었다.
아처는 그 이후로 길가메시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아처는 상황이 당혹스럽기도 했고, 그에게 화가 난 것도 있었으며, 제멋대로인 그를 상대하기에 기가 질린 것도 있었지만 일단 그와 마주했을 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가 곤혹스러웠다. 아처는 길가메시가 반강제로 교회로 끌어들인 이래로 줄곧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임신 건이 터진 이후로는 길가메시의 얼굴을 보기가 싫어 교회를 나올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거처를 옮기기는 또 그런가 싶은 마음이 들어 여태 머물면서 길가메시만 재주껏 피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기어코 아처를 봐야겠다고 한다면 그다지 넓지도 않은 교회에서 이뤄지는 그 술래잡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었지만, 길가메시도 그가 하는 양을 내버려둘 모양인지 그리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않았던 듯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용케 그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다닐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 오느냐.”
“……길가메시.”
서점까지 외출한 김에 가게에 들러 식료품까지 이것저것 골라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든 아처가 교회 언덕을 오르자, 그 앞에 길가메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하늘의 노을빛을 맞으며 길가메시가 아처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곧잘 반짝거리는 금발이 노을에 젖어 빛나는 것이 퍽 눈이 부셨다. 그러나 아처는 그런 감상보다는 현재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거북함에 슬쩍 인상을 썼다.
“한동안 보이지 않기에 그 낯짝을 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좀 존중해주는가 싶더니, 어찌 이리 마중까지 행차하셨는지.”
“감히 왕의 옥안을 일러 그런 무례한 언행, 여전히 불경하기 짝이 없는 주둥아리로구나.”
“무얼, 새삼스럽게.”
“하기사 네놈이 불경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느냐마는.”
“그거 유감이로군. 지고하신 영웅왕 폐하에 비해 이 몸이 가진 재간이라곤 세 치 혀밖에 없는 관계로.”
“왕이 지고한 것을 아는 놈이 그러느냐.”
그렇게 말하며 길가메시가 슬쩍 눈을 휘며 웃었다. 아처는 그 웃음에 괜히 속이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 어쩐 일로 외출이 길어진 것이더냐? 며칠간 얌전히 틀어박혀있기에 몸가짐을 조심하는가 싶었거늘.”
“몸가짐 같은 소리…….”
무어라 반박하려던 아처는 부러 거처를 옮기려 하지 않았던 제 행동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길가메시는 그에 대해 묻지는 않은 채 아처의 양손 가득 들린 장바구니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간지가 한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기에 답지 않게 나들이라도 즐기나 하였더니, 기껏해야 장이나 보고 있었더냐. 그런 것은 번견을 시키면 될 것을.”
“그리고 불평을 듣는 건 내 몫이겠지.”
“귀담아 들을 필요 있더냐. 허면 코토미네를 시키든지.”
잠시 신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모습을 떠올린 아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장을 봐 온 것이야 어디까지나 서점을 들른 김에 겸사겸사 한 것에 불과했지만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간만에 상점가에 나온 것에 무심코 흥이 나서 잠시 이것저것, 이를테면 요리책 코너나, 가전제품 매장이나, 식기 매장이나 주방용품 코너나 마트 식품관 등등을 실컷 기웃거리고 온 덕에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면 길가메시도 아처가 무엇 때문에 외출했는지까지는 눈치 채지 못할 듯싶었다. 애초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도 했고.
“곧 있으면 바람이 서늘해지겠구나. 들어가자.”
“바람 좀 찬 것이 무슨 대수인가.”
“네놈에게는 아니어도 태중의 아이에게는 대수일지 모르잖느냐?”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네놈과 얼굴을 마주대할 생각이 없다.”
“고집이 질기구나. 앙탈도 오래 가면 귀엽지 않은 법이다.”
“귀여워질 생각 없으니 잘 됐군.”
아처가 비아냥거렸지만 길가메시는 별 다른 대답 없이 웃는 얼굴을 한 채로 아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교회 건물로 들어가는 길목 한가운데를 막아선 길가메시는 아처가 다가설 때까지 비켜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길가메시를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겠지. 아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그러나 신기한 일이기는 하구나.”
길가메시의 목소리에 아처가 그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짐을 풀어 냉장고를 그득하게 채워둔 아처는 만족스럽게 웃고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어차피 길가메시가 멋대로 끌고 들어온 식객 비슷한 입장, 주어진 제 방이랄 것이 있지는 않았으니 길가메시를 피해 나온 아처는 빈 방 하나에 양해 없이 들어앉았다. 어차피 신부는 아처나 길가메시가 어디서 무얼 하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아처는 객실처럼 보이는 그 작은 방을 사양 않고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입장이니 길가메시에게 제 영역이라 주장하기는 조금 껄끄러워, 아처는 자신을 따라 들어와 당당하게 방 가운데를 점령한 길가메시에게 나가라고 말할까 아니면 제가 나갈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 밋밋한 뱃속에 생명 하나가 새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 말이다.”
“네놈이 그렇게 만들었잖은가.”
“그리했지. 허나 수태는 언제 봐도 신비한 일이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웅이라는 자가 신기할 것도 많군. 그리 감성적인 성격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이것은 감성과는 다른 문제다, 아처여.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그 일생에서 유일무이하게 창조를 해내는 과정이 아니냐. 어찌 신비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길가메시가 다가와 아처의 곁에 앉았다. 아처는 자신이 침대 위에 앉아있었던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책상의 의자는 이미 길가메시에게 점령당하고, 작은 방에는 그 외에는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 별 생각 없이 그리 했던 것인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뒤로 밀쳐져 눕혀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길가메시는 느리게 손을 뻗어 아처의 배를 살짝 짚을 뿐이었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임신이라고 완벽히 창조의 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세포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라면 되었다. 몸을 불리는 것뿐이라면 생물이라면 누구나가 일생동안 그리 하는 것이지. 허나 영혼은…….”
걸친 옷 한 겹 너머로 길가메시의 손끝이 아처의 배 위를 쓰는 것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졌다. 복근의 형태를 더듬듯 손끝으로 살살 쓸어내리던 손길은 돌연 가까이 다가와 손바닥 전체로 그 위를 짚었다. 움찔 몸을 떤 아처가 배를 감싸오는 손길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동요가 길가메시에게 곧이곧대로 전해졌을 것이 마뜩찮았다.
“영혼은 새 생명에게 깃드는 것이지. 신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저 좋을 대로 영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
그 몸의 반 이상이 신이라 제 입으로 말한 이가 하는 말이어서인지 퍽 기묘하게 들렸다. 아니면 부모를 신으로 두고 있는 자이기 때문인가. 아처는 제 배를 어루만지듯 쓰다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체온이 전해져오는 느낌이 묘했다. 거북하기도 하고 간질간질하기도 한 감각이었다.
“……무얼 그리 만져대나. 태동이 느껴질 시기는 한참 멀었다.”
아처가 길가메시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며 말했다. 길가메시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처가 빠져나가려 몸을 뒤로 빼자 오히려 길가메시가 손을 뻗어 아처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아처가 잡힌 손목을 잡아 빼려 몇 번 힘을 줬지만 썩 용이하지 않았다. 길가메시를 밀쳐내고 일어나려다 오히려 침대 쪽으로 떠밀린 아처는 그제야 자리를 벗어나기를 단념했다. 붙잡은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낀 길가메시는 붙든 손목을 놓아주고 아처를 부드럽게 밀어 눕히며 큭큭 웃었다.
“허니 어찌 기특하지 않으냐. 게다가 네가 태중에 품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짐과 너의 자식이니.”
“나는 바란 적 없는 자식이다.”
길가메시에게 떠밀려 반쯤 드러누운 채 아처가 말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모에게 부정당하니 뱃속의 아이가 들으면 슬퍼하겠구나.”
“자식을 갖겠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초에 그럴만한 온화한 생활을 한 적도 없어.”
“지우겠다고라도 말할 것 같은 말투이지 않으냐.”
“필요하다면.”
말하면서 아처는 이를 악물듯 몸을 긴장으로 굳혔다. 길가메시는 본디 거스르는 이에게는 가차 없는 자였다. 아처가 그와 얽힌 이래로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비교적 얌전하게 굴고 있다고는 하나 그 성정이 어디 가지는 않을 터. 그 영웅왕의 자식을 지우겠다고 말한 것이다. 응당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눈을 들어 흘끗 아처를 바라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길가메시의 새빨간 눈동자는 그저 아처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아래를 향했다. 금색 속눈썹이 그 눈길을 따라 아래로 내리깔리는 것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별 반응이 없는 건 의외인데.”
“뭐, 화나지 않는 말은 아니다마는.”
말하며 길가메시는 아처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옷을 걷어 올렸다. 단추를 풀어내지 않는 것을 보아 아주 벗길 마음은 없는 모양이라고 아처가 생각했다.
“그리 말하여도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옷이 걷혀 드러난 피부 위를 길가메시의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엄지손가락이 꽉 짜인 근육 라인을 따라 훑다 옆구리로 타고 내려가 손바닥 전체로 쥐었다. 아처는 손을 들어 길가메시의 손 위를 덮었다. 눈꺼풀이 다시 한 번 들리며 붉은 눈동자가 아처의 미묘하게 당혹한 표정을 담았다.
“너는 다정한 성격이니 말이다.”
그리고 길가메시는 고개를 숙여 아처의 배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잠시간 짓눌리듯 닿았다 떨어졌을 뿐이었지만 아처를 놀라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
길가메시는 마치 여운을 즐기듯 잠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로 고개가 들렸을 때 길가메시는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하고 아처를 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눈웃음에 가늘게 휘어졌다.
“그러니 네가 부디 태교에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 아처여.”
그 목소리는 또 즐거움에 가득 차 있어서 아처는 그저,
“……나중에 책이나 읽어다오.”
하고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870자